한국의 경제력은 세계 13위에 오를 정도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선진국의 수혜를 받아야 했던 빈곤국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궈내며 불과 50년 만에 해외 원조를 하는 신흥 경제대국으로 발돋움 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해에는 국제사회의 주요 국가들이 참가하는 G20 정상회의 의장국으로 제5차 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한국은 더 이상 후진국이 아니다. 특히 의료분야는 선진국 수준을 육박한다. 성형은 물론 암치료에서도 선진국 못지 않은 실적을 보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전국민이 가입하고, 보험료를 내는 건강보험제도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성공한 제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77년 5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시작한 건강보험제도는 1979년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 및 3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 1988년 농어촌지역건강보험, 1989년 도시 자영업자까지 확대하면서 제도 도입 12년 만에 전국민 건강보험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의료보험제도의 구축과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국민의 건강수준은 세계 상위권으로 도약하고 있다.
지난 5월 세계보건기구(WHO)가 발표한 '2011년 세계보건통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기대수명은 80세(2009년 출생아 기준)로 조사돼 WHO 193개 회원국 가운데 공동 20위 수준으로 영국·독일·핀란드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1979∼1988년까지 대한의사협회장으로 또 보건사회부 장관(1988년 12월∼1989년 7월)으로 활동하는 동안 의료보험제도 창립과 완성에 이르기까지 직간접적으로 참여해 온 필자로서는 국민의 건강 수준을 높이고, 의료의 발전에 기여하는 건전한 보험제도로 발전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의료보험제도를 이끌어 가는 정부와 보험자단체는 제도의 한 축인 보건의료계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고, 의견을 묵살하는 비상식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최근 들어 가장 어처구니 없는 행태는 WHO가 부당하게도 한국의 건강보험제도 개선안을 권고한 것이다. WHO는 최근 한국의 건강보험 재정 적자를 막고 국민의 진료비 부담을 줄이는 방안으로 ▲건강보험료 인상 ▲본인 부담금 차등화 ▲의료수가 조정 ▲성분명 약 처방 도입 등 4가지를 제안했다고 한다.
필자는 보사부 장관 재임 시절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WHO 총회에 참석해 연설을 한 기억이 있다.
당시 WHO는 '모든 사람에게 건강을'이라는 목표를 내세우며 세계 각국의 모든 사람들이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필자는 의료전문가로서 WHO의 권고와 계획을 살펴볼 때 성공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평가했다.
WHO가 이상적인 목표는 제시할 수 있을지 몰라도 각 나라의 의료정책과 환경까지 감안한 계획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의료보험제도는 나라마다 재정상태는 물론 국민의 건강 수준과 보험제도의 경험 등 의료환경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세계 각국마다 다를 수 밖에 없는 의료보험제도의 특성을 충분히 연구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WHO가 "이래라 저래라"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건강보험공단의 고위 간부가 국민의 피땀으로 거둬준 건강보험료로 비싼 해외 출장비를 써가면서 WHO에 조언을 자청했다는 것이다.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의료보험제도와 정책은 관련 단체와 국민의 의견을 반영해 심도있는 논의과정을 거쳐 공정한 방법으로 최선의 방법을 도출해 나가는 것이 정당한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건강보험공단이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키고, 국민과 의료인의 자존심을 짓밟으면서까지 WHO에 귀 동냥을 하는 행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WHO의 조언이라는 핑계로 이해당사자들이 원하지 않는 의료정책을 강요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건강보험공단 관계자가 받아온 WHO의 조언을 중장기적 보건의료제도 개선과제를 논의하는 보건의료미래위원회에 보고하겠다는 정부의 저자세도 문제다.
성분명 약 처방이나 전문의 수가를 깎아 일반의(GP) 수가는 높여야 한다는 WHO의 조언은 한국의 의료현실과 국민의 의견을 전혀 감안하지 않은 무책임한 내용이다.
WHO의 조언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탁 통치를 자청하는 일이고, 정부 스스로 국가의 건강보험제도를 이끌어갈 능력이 없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건보공단 또한 한국의 의료현실을 잘 모르는 WHO에 손을 벌려야 했냐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WHO가 독립 국가의 의료정책에 관여하는 인상을 주는 것은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건강보험제도와 관련하여 큰 문제를 안고 있는 미국, 제도 도입을 못하고 있는 후진국 및 빈곤국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의견 제시를 못하고 있는 WHO가 유독 한국에 대해서는 일부 기관의 요청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공개적으로 정책에 관여하는 인상을 주는 것은 온당한 처사도 아니고 국제 사회에 대한 균형 잡힌 관여라고도 보기 어렵다.
더군다나 WHO는 최근 여러 나라와 단체들로부터 지나치게 정치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우리나라의 학자, 전문가들도 나라의 체면을 지키는 관점에서 처신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WHO의 무책임한 권고에 대해 이렇다할 반박을 하지 않고 있는 의료계도 반성해야 한다. 의료분야의 전문가인 의료계가 당당히 할 말을 하고, 일어설 때는 과감히 일어서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대한민국 의학전문지 헬스코리아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