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코리아뉴스] 지난해 1월20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2민사부는 흡연과 폐암 발병 간의 인과관계조차 인정하지 않는 내용으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제기한 담배 소송에 대해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에 공단은 즉각 항소를 제기하였으며 외부 소송대리인으로 법무법인 대륙아주를 선임한 바 있다.
항소심에서 새로 선임된 대륙아주는 방대한 재판기록 검토를 거쳐 내일(2일) 1심 판결의 오류 및 추가심리가 필요한 부분을 중심으로 서울고등법원에 항소이유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항소이유서 제출을 앞두고 우리 사법부의 상식에 벗어나는 판결에 국민적 분노가 쌓여가고 있다.
건보공단이 1일, 담배소송 1심 판결에 대한 국내외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향후 대응 방향 등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한 ‘담배소송 국제세미나’ 참석자들의 발언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 사법부가 얼마나 황당한 판결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고 남는다. 마치 외계의 판사가 내린 유체이탈 판결처럼 느껴진다.
전문가들의 지적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 우선 이번 1심 담배 소송은 대법원의 선행 판결 사안과는 당사자가 다르고, 주장과 증거들도 상이이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기존 대법원 판결을 거의 기계적으로 복기하고, 특이성·비특이성 질환을 임의로 구분하여 피해자들에게 엄격한 증명책임을 지웠다. 결국 유해물질로 발병되는 질환에 관한 인과관계 증명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가습기살균제 제품과 담배 제품 사용이 경합되어 질병이 발생되는 경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두 가지 제품을 모두 사용한 소비자에게 결과적으로 폐 질환이 발병하였다면, 피해자는 어느 제품의 제조자로부터 피해구제를 받을 수 있을까. 본 건 판결에서 법원의 논리에 따르면, 가습기살균제 제조업자는 담배로 인한 발병 가능성 때문에, 그리고 담배 제조업자는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발병 가능성 때문에, 두 제품의 제조업자들은 모두 면죄부를 받게 될 것이다.
법원이 엄격한 인과관계의 증명책임을 피해자에게 부담시키는 결과는 현실과 괴리된 책임의 분배로 나타나고, 결과적으로 피해자에게 그 손해를 감수하도록 강요한다. 재판이 당면한 현실을 외면하고 법리와 논리에만 치중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맹목적 정의, 우둔한 공평함이 바로 이것이다.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정상현 교수)
#. 1심 법원이 흡연과의 인과관계를 부정하면서 제시한 이유들은 어떤 각도에서 보아도 합당하지 않다. 특히, 흡연으로 인하여 폐암(편평세포암, 소세포암)이 발병하였다는 사실 자체는 합리적 추론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흡연 이외에 다른 원인으로 암종이 발병하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하라는 것은, 총을 쏴서 사람이 죽었는데, 피해자가 총알 이외에 다른 원인으로 죽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하라는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역학의 철학’ 저자 요하네스버그대학교 알렉스 브로드벤트 교수)
#. 미국은 1980년대 이후 담배의 중독성에 대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고, 중독에 대한 신경과학적 이해가 진전됨에 따라 담배회사들이 소송에서 패소하기 시작했다. 소송 과정에서 담배가 담배회사의 이윤을 위해 중독설계되는 제약상품과 같은 것이며, 이러한 중독에 대한 과학적 사실과 증거들이 담배회사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은폐되고 왜곡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반면, 건보공단 담배소송에서는 미국 법정에서 명확히 밝혀진 사실, 즉 담배회사들의 고도화된 증거생산과 중독설계, 이에 대한 은폐 사실들을 모두 외면하고 있다. 이러한 국내 법원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담배회사들과 달리 중독 설계에 대하여 무지했던 소비자들은 법적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해 원천적으로 봉쇄당하는 것이다. (서울대 이두갑 교수)
#. 캐나다에서 최대 규모의 피해 배상이 인정된 퀘벡주의 집단소송은 항소심까지 승리했음에도, 담배회사들의 파산보호신청으로 인하여 배상금이 지급되지 않은 상태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다.
캐나다에서의 소비자에 대한 호의적인 판결은 지난 수십 년 간 실패를 통해 거둔 성과다. 담배업계와의 소송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담배업계 변호사들의 전략에 저항할 수 있는 변호인단의 절차적 통찰력, 담배회사의 내부 문건들, 그리고 입법을 포함한 제도적 지원 등이 필요하다. (‘담배 없는 캐나다를 위한 의사회’의 닐 콜리쇼우 연구소장)
위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나라 사법부의 정의는 맹목적이며, 결코 공평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담배의 해로움을 널리 각인시키고 있는 다른 나라 사법부의 판결과도 크게 동떨어져 있다. 아래 판결은 우리 사법부와 다른 나라 사법부의 판결이 어떻게 다른지 잘 보여준다.
①캐나다 판결 (Justice Brian J. Riordan June 9, 2015 Judgment)
“회사는 공공 보건 당국이나 대중에게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직접 알리지 않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고객의 건강보다 이익을 선택했다. 그 선택에 대해 어떤 다른 말을 할 수 있든, 그것은 엄청난 잘못이고 징벌적 손해배상의 맥락에서 고려되어야 하는 과실임이 분명하다.”
②한국 판결 (서울중앙지방법원 2020. 11. 20. 선고 2014가합525054 판결)
“따라서 원고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피고들(담배회사들)이 이 사건 대상자들에게 불법행위를 하였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으므로, 피고들은 일반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하지 않는다.”
담배소송은 흡연의 폐해를 분명하게 알리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흡연은 개인의 의지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국민 전체의 건강문제다. 이러한 이유로 국가 차원의 해결을 위하여 많은 정책적 지원과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사법부만 19세기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판사를 인공지능(AI)으로 대체하자는 국민적 비판이 쏟아져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답답함을 건보공단 김용익 이사장은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담배소송 선고 과정을 보면서 담배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크게 바뀌었음에도 그 인식이 사법제도를 통해 인정되기가 힘들다는 점을 확인했다. 담배소송은 가습기살균제 피해, 익산장점마을 집단 암 발병 등 유해물질로 인한 피해 사건들과 인과관계 증명에 있어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고 있으며, 지금의 사법부 잣대로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계속하여 묻힐 경우, 그 피해는 전체 국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