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의료산업 수출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팔을 걷어붙였다. 박 대통령은 최근 중동 4개국을 방문해 이 지역 국가 정상들과 의료분야 수출을 위한 논의를 진행했다. 정부는 의료산업이 국부 창출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몇몇 의료기관들의 성공사례도 있거니와 우리나라의 강점인 ‘서비스(3차)산업’을 활용하면, 의료산업이 ‘황금알’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런데 의료산업 수출이 기대만큼 성과를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의료기관들의 해외진출 사례와 정부 정책을 짚어보고 일본의 의료산업 수출이 주는 교훈을 알아보았다. [중] 국제표준 아닌 ‘병원정보시스템’ 수출 … 과연 성공할까? |
# 표준화 없인 수출 어려워 … 3700억 연구도 ‘흐지부지’ = 지난 2013년 분당서울대병원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의료정보 시스템 수출계약을 체결했다. 의료정보시스템은 전자의무기록(EMR)을 포함해 클라우드컴퓨팅, 사용자 기반 인터페이스 등 진료에 사용되는 모든 전자체계를 말한다.
분당서울대병원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병원은 2010년부터 IT 시스템을 개선해 차세대 병원정보체계와 DR(disaster recovery, 재해 발생시 기술 인프라를 복구·재개하는 시스템), PACS(의료영상정보저장전송시스템)을 도입하고 기존에 사용하던 전자정보체계를 새롭게 손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우디 정부는 분당서울대병원을 두 차례나 거부했다. 병원이 내놓은 두 편의 기획안(의료정보시스템)이 국제표준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분당서울대병원은 그전에 이미 미국보건의료정보관리시스템협회의 최고 등급인 ‘7단계 인증’을 받았던 덕에 ‘국제표준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계약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병원 중 의료정보 시스템의 국제표준화인 EHR을 지키고 있는 곳은 극히 드물다. 병원들이 각각 다른 프로그램을 사용해 한 병원에서 근무했던 사람이 다른 병원에 가서는 시스템을 새로 익히기 위해 애를 먹는 경우도 있다. 유럽과 미국의 병원들 중 대다수가 국제표준에 맞는 병원정보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는 것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왜 병원마다 다른 의료정보 시스템을 구축해 놓은 것일까. 그 이유는 병원들의 ‘업무전산화’ 경쟁과 의료법에서 찾을 수 있다.
1980년대 말부터 병원들은 기존에 있던 원무·보험청구·행정·약제 등의 정보체계를 종이에서 컴퓨터로 옮기는 ‘업무전산화’ 작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 1993년 당시 국내 32개 종합병원의 업무전산화 도입률은 무려 37.3%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병원들은 ‘첨단병원’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경쟁적으로 전산 프로그램을 도입했는데, 다양한 제품(전산시스템)이 난립하다보니 자연히 표준화에서 멀어지게 됐다.
여기에 의료법 상 ‘환자의 의료정보는 유선망을 통해 접속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규정이 들어가면서 병원들의 전산시스템은 더욱 폐쇄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게 됐다.
물론 표준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2002년 대한의사협회는 의료정보표준화소위원회를 구성, 의료IT업체들과 함께 정보표준화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의료계와 민간기업 간의 표준화 움직임도 있었다. 2004년 대한PACS학회·대한의료정보학회 등 의료단체와 삼성SDS·LG CNS·인피니트테크놀로지 등의 업체들은 PACS의 국제 표준화를 위한 IHE 코리아를 결성했고 정부도 EMR 표준화를 위해 미국 HL7과 계약을 체결하고 ‘통합의료정보시스템 구축 사업단’을 만들어 표준화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움직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의협은 회장단이 바뀌면서 추진력을 잃었고, 총 3700억원을 들인 표준화 프로젝트도 2009년 예비타당성 검토에서 사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부적격 판정을 받아 계획이 전면 중단됐다.
# 정부 ‘디지털의료’ 수출 한다지만 … 표준화 없인 구름 위에 집짓는 격 = 지난 2013년 대통령인수위원회는 국정과제 중 하나로 ‘신 의료‧융합서비스 발전 기반 조성’을 내걸고 국가 보건의료정보 표준화와 의료정보 공유‧보호 제도 정비, 그리고 융·복합 서비스(U-health, PHR)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정기택 한국보건산업진흥원장도 올해 1월 열린 신년교례회에서 “보건산업이 창조경제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겠다”며 해외 수출을 위해 국내 병원·제약·의료기술·정보통신을 한데 모은 ‘K-Medi 패키지’를 세계 시장에 내놓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국의 정보통신 기술을 이용해 의료·ICT(정보통신기술) 헬스·제약·의료기기 산업등을 한데 어울러 중국·중동·중남미 등의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의료기관용 표준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연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 분야별 민간 표준화 전문가인 ‘국가표준코디네이터’ 제도를 도입해 표준화 로드맵을 제시했다.
그러나 아직 국내 의료기술 표준화 추세는 요원한 상태다. 기술력과 비용 때문이다.
우선 국제 표준으로 공인된 미국의 ISO/HL7 및 유럽의 ISO13606을 충족하는 시스템 기반(플랫폼)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게는 1200페이지에서 많게는 3만 페이지가량의 기술 개요를 이해하고 이를 옮겨야 하는데, 자생적으로 비표준기술이 발전된 한국 시장에서 이를 구현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플랫폼이 마련된다 해도 기존 병원들의 데이터 이전 및 시스템 구매에는 많은 비용이 필요한 상태다.
전문가들은 다양한 IT 응용기술보다도 표준화 작업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국내 최초로 국제표준 EHR 플랫폼을 만든 누스코 백창우 대표는 지난해 기자간담회에서 “의료산업분야에 있어서 국제표준을 준수한 기술 경쟁력 확보가 중요하다”며 “표준화 환경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성질환관리시스템, 빅데이터, 유헬스 등을 개발하는 것은 구름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