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인 유일한 박사⑨-끝] 시대의 양심이 남긴 정신적 유산
[제약인 유일한 박사⑨-끝] 시대의 양심이 남긴 정신적 유산
  • 박정식 기자
  • admin@hkn24.com
  • 승인 2019.08.14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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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기업 유한양행 창립자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민족기업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아래 민족기업 유한양행을 창업한 유일한 박사. 그는 새로운 기업 윤리를 이 땅에 뿌리 내린 기업가이기에 앞서 일제 강점기 시절 서재필 박사 등과 함께 우리나라 해방을 위해 온몸으로 싸워온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유일한 박사는 생전에 자신이 해왔던 많은 일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오로지 정직과 신뢰가 담긴 행동을 실천에 옮겼을 뿐이지만, 그의 희생적이고 빛나는 업적은 각종 자료와 문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 의해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격동의 시대를 맞고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족의 혼을 일깨운 유일한 박사의 사상과 철학일지도 모른다. 유일한 박사의 정신적 유산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전해질 수 있도록,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편집자 주]

 

 

[헬스코리아뉴스 / 박정식 기자] 유일한 박사의 삶은 매순간이 위기였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설움도 컸지만, 나라를 되찾은 이후에도 해방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분단된 조국의 아픔과 마주해야했다. 민족상잔의 비극 뒤에는 어수선한 정국이 그를 기다렸고 4·19혁명, 5·16군사정변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신념이 있었기에 파란만장한 격동의 시기를 견딜 수 있었다. 그가 평생을 지켜온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이 그것이었다. 더불어 사회에 필요한 유능한 인재를 키워야한다는 사명감도 남달랐다. 이 같은 소신은 그가 말년에 보인 활동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우리나라 기업 최초로 주식 공개

집무중인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집무중인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유일한 박사가 예순여덟에 접어든 1962년. 그는 우리나라 기업 최초로 주식공개를 결심한다.

유한양행 내 간부들은 유 박사의 결정을 만류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유한양행은 공개된 주가보다 다섯배에서 여섯배의 기업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소유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공개는 곧 손해로 이어지는 자충수라 여겼던 탓이다. 그들은 오히려 공개를 서두르기보다는 소유 자산의 재평가를 내려 적절한 주가로 끌어올릴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 박사의 결심을 돌릴 수는 없었다. 이미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그에게 주식공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생의 과제였던 것이다. 유 박사는 오히려 공개를 미루자는 의견을 냈던 간부들을 나무랐다.

“우리나라 기업이 한 두 사람의 손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장족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회사가 다소 시끄러워질망정 많은 사람을 참여시켜야만 회사발전에 도움이 되고 국가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 아닌가.”

모든 기업이 공개 법인체가 돼야만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유지되고, 국가적으로 최선의 봉사가 될 수 있다는 믿음과 철학을 가지고 있던 유 박사는 자신의 의지를 실천으로 옮겼다.

주식공개를 한 다음해인 1963년 연세대에 개인재산인 주식 1만2000주를 기증했으며 보건장학회에는 5000주를 기증하는 등 개인 소유의 주식과 재산 대부분을 육영사업과 보건기구에 기부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아동양호회에 약품을 기증하는 등 사회공헌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유 박사가 주식을 공개하며 사회환원에만 집중했던 것은 아니었다. 해마다 투자를 유치하며 자본금을 늘려 나갔으며, 외국의 저명한 제약사들과 제휴를 맺으면서 기업을 확장하는데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기에 유한양행은 날로 성장해 갔다.

 

학교 설립하고 무상교육 실현

개인소유 주식을 유한공업고등학교에 기증하는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개인소유 주식을 유한공업고등학교에 기증하는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일찍이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인재양성이 중요하다고 여긴 유일한 박사는 교육사업에 많은 공을 들였다.

1957년 우리나라에 기술인력이 부족한 것을 실감한 유 박사는 경기도 부천 소사 지역에 지금의 유한공업고등학교 전신인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설립해 전체 학생에게 학비와 숙식비를 무료로 제공했다. “일하는 사람만이 배울 수 있고 교육에 참여할 수 있다”는 유 박사의 교육철학에 따라 초창기 교육과정은 실습을 대폭 강화하며 기술인력 양성에 힘을 쏟았다.

유한양행의 주식을 공개한 1962년에는 지금의 학교법인 유한학원의 전신인 재단법인 유한학원을 설립했으며 1966년에는 유한중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유한재단은 유 박사의 뜻을 살리기 위해 1978년 유한중학교를 폐교하고 대신 유한대학 전신인 유한공업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유능한 인재를 기르기 위한 유 박사의 신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서거 1년 전인 1970년에는 개인주식 8만3000여주를 기탁해 유한재단의 전신인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 이라는 공익재단을 설립하고 교육 및 장학사업의 지속적 기반을 마련했다.

교육에 대한 애착은 그의 일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생전 유일한 박사는 기업인으로서보다 교육사업가로서 더 자부심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유 박사는 외국 출장 때에도 ‘유한양행 회장’이라는 명함보다는 ‘Educator’라 씌여있는 명함을 즐겨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젊은 학생들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느껴 틈이 생기면 학교를 찾았다. 격의없이 어린 학생들을 안아주고 어깨를 두드려 주며 격려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쉬는 시간이나 운동장에서 이뤄졌다. 당시 유 박사는 학생들에게 늘 이 말을 전했다고 한다. 

“너희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우리나라가 발전한다.”

 

1원도 부정이 없었던 유한양행 ... 정부, 유일한 박사에 동탑산업훈장 수여 

1968년 동탑산업훈장을 수여 받은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유일한 박사가 1968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동탑산업훈장을 받고 있다. (사진=유한양행)

유한양행의 투명한 기업경영과 이윤의 철저한 사회 환원이 1960년대 이후부터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면서 유일한 박사는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표창을 받았을 정도로 사회로 부터 존경과 칭송을 받았다.

특히 1967년 말의 일화는 사필귀정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국세청은 세원을 파악해 국세 수입을 올리기 위해 업종별 세무사찰을 엄격히 실시했다. 이때 국세청의 눈에 들어온 것은 유한양행이었다. 연간 3억원의 거액을 자진납부하고 있었기에 더 많은 세원을 확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1967년 11월15일 국세청은 유한양행에 대한 고강도 세무감찰을 실시했다. 특별사찰반원들은 12월7일까지 유한양행의 장부를 빠짐없이 면밀히 검토해 나갔다. 그러나 결과는 유한양행에 1원도 부정수입이나 부정지출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중장부가 횡행하던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

특별사찰반은 장부조사에 머물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부정을 파헤치기 위해 유한양행이 판매하고 있는 약품들을 모두 과학기술처로 이송해 함량 여부를 의뢰한 것이다. 과학기술처는 곧 간단한 회신을 보냈다.

“함량 미달 없음.”

투명한 기업활동을 펼쳐온 유한양행으로서는 당연한 결과였으며 정부 역시 유한양행의 기업정신을 높이 평가할 수 밖에 없었다. 1968년 3월 ‘세금의 날’을 맞아 업계 최초로 유일한 박사는 동탑산업훈장을 받았으며, 유한양행은 지금까지 우수납세기업의 자리를 견고히 지키고 있다.

여기서 놀랄만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당시 훈장을 수여 받은 유일한 박사의 태도가 너무나 태연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모든 기업체가 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유 박사였기에 놀랄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찬탈한 독재자의 훈장이 달갑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시대의 양심이 남긴 정신적 유산

1970년 유한공업고등학교 졸업식을 찾은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1970년 유한공업고등학교 졸업식을 찾은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독립운동가이자 기업가, 사회공헌가, 교육자로까지 폭넓게 활동하며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온 유일한 박사는 1971년 3월11일 76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공식행사는 1970년 제4회 유한공고 졸업식 참석이었다. 당시 유 박사는 투병생활로 기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병상에만 누워있고만 싶지는 않았다. 그가 힘이 닿는 순간까지 자신이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만나 학생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이 우리나라의 기둥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졸업식에 참석한 유일한 박사는 생전의 마지막 연설인 졸업생을 위한 축사를 전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졸업을 축하합니다. 내가 미국에서 보니까 기술이 있는 사람은 잘살고 기술이 없는 사람은 잘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기술자가 되려면 우선 자기가 하는 일에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그리고 정확하게 일해야 합니다. 장사를 해도 신용이 으뜸인 것처럼, 물건을 만드는데도 조그마한 속임수가 없어야 합니다. 작은 기술이라도 성의를 다하면 그 기술은 점점 발전하게 되고 그래야만 남으로부터 인정받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배운 것에 만족하지 말고, 더욱 열심히 배우고 연구해서 우리나라의 기술이 세계 수준을 능가하도록 노력하여 주십시오. 여러분들의 졸업을 다시 한 번 축하합니다.”

졸업식 축사를 끝으로 유일한 박사는 1970년 4월 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힘겹게 병마에 싸웠지만 1971년 3월에 접어들면서 그의 병세는 거동이 힘들 정도로 위중해졌고, 3월11일 유한공업고등학교 내 유한동산에 잠들었다.

유일한 박사가 세상을 떠나고 약 한 달 뒤인 1971년 4월 4일 그가 생전에 남긴 유언장이 공개되면서 다시 한 번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유일한 박사의 육신은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녹슬지 않는 그의 정신은 후세에 길이 남았다.

그가 세상에 남긴 유언장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손녀 유일링(당시 7세)에게는 대학 졸업 시까지 학자금 1만 달러를 준다.

둘째, 딸 유자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의 (내)묘소와 주변 땅 5000평을 물려준다. 그 땅을 유한동산으로 꾸미되 결코 울타리를 치지 말고 유한중·공업고교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여 어린 학생들의 티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달라.

셋째, 내 소유주식 14만941주는 전부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에 기증한다.

넷째, 아들 유일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유일한 박사가 남긴 유언장. (사진=유한양행)
유일한 박사가 남긴 유언장. (사진=유한양행)

말보다는 실천을, 사익이 아닌 공익을 앞세워 살아온 ‘시대의 양심’,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화신’ 유일한 박사. 그가 남긴 정신적 유산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그리고 광복 74주년을 하루 앞둔 오늘 더욱 빛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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