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회사가 건보공단의 밥인가
제약회사가 건보공단의 밥인가
개정 약가협상 지침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 이순호 기자
  • admin@hkn24.com
  • 승인 2019.06.14 07: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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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코리아뉴스 / 이순호 기자] 요즘 건강보험공단을 보면 옆 나라 중국이 떠오른다. 개방정책이 펼쳐진 이후로 자본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회주의적 대의와 강력한 공권력을 앞세워 시장을 쥐고 흔드는 나라다. 

건보공단이 최근 내놓은 약가협상 지침 개정 내용을 보면 이 나라가 과연 자본주의 체제인가 의문을 갖게 한다. 이 개정안에는 약가협상시 부속 합의서에 ▲협상 약제의 원활한 공급 의무 및 환자보호에 관한 사항 ▲협상약제의 안전성·유효성 확인 및 품질관리에 관한 사항 ▲경제성 평가 자료 제출 생략약제, 위험분담약제 등의 이행조건에 관한 사항 ▲비밀유지 의무에 관한 사항 ▲그 밖에 협상 약제에 대한 안정적인 보험급여 및 건강보험 재정관리 등을 위하여 필요한 사항 등 5개 항목을 추가했다.

약가를 결정하거나 조정하는 데 필요한 사항들을 합의토록 했던 기존 합의서에 약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그중 한 가지 눈에 띄는 항목이 있다. 제약사에 공급 의무를 부과하는 내용이다.

지난해 국내 급여권에 진입하고도 공급을 거부했던 게르베코리아의 '리피오돌'과 오츠카의 '아이클루시그' 사태 등이 발생하면서 급여약에 대한 사후관리와 제약사 이행 의무사항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추가한 것이다.

예컨대 리피오돌을 공급하지 않은 게 게르베코리아의 잘못이므로, 앞으로 건강보험에 등재하려는 제약사에 '합의'를 통해 공급의무를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말이 '합의'이지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약가를 받지 못하면 시장 진입조차 불가능한 제약사들 입장에서는 '협박'에 더 가깝다.

당시 게르베코리아는 2015년 이후 수입 원가 상승이 반영되지 않아 손실이 누적되고 있다고 공급 중단 결정 배경을 설명했다. 

지난해 보건복지부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강승호 게르베코리아 대표는 "최근 세계적으로 리피오돌 수요가 급증했고, 지난 2015년부터 보건복지부와 적정 가격에 대해 협의했으나 좋은 결과를 만들지 못해 대한민국이 공급의 후순위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복지부가 우선 원가 보전을 하고 추후 추가 인상을 제안하지 않았냐는 국회의원의 질문에 "한국이 공급 후순위에 배치된 뒤에도 60일 치 재고를 확보하고 정부와 협상을 추진했다"며 "약가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정적인 공급이다. 적정한 가격이 되어야 안정적 공급이 가능하다"고 답했다.

국회의원들은 강 대표를 향해 "환자의 목숨을 담보로 협상을 벌인 것은 문제가 심각하다"고 질타를 퍼부었다. 반면 약가협상을 한 보건복지부에는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는 주문뿐이었다.

건강보험 재정 확보를 이유로 가격 인상을 거부한 건보공단과 보건복지부의 행위는 환자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인가.

게르베코리아는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다. 그것도 주주들로부터 투자금을 받아 운영되는 주식회사로 자본시장의 영역에 있다. 이들 입장에서는 소위 '가격을 후려치는' 한국보다 적정 가격을 제시하는 국가에 제품을 우선 공급하는 것이 지극히 상식적이다.

반대로, 보건복지부와 건보공단을 보자. 지난해 건강보험 재정 누적 흑자는 20조원에 달했다. 앞으로 정부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인 '문재인 케어'를 실시하면서 한동안 당기 적자가 발생하겠지만, 5년 뒤인 2023년에도 누적 흑자가 11조원 정도를 유지할 것으로 건보공단은 전망하고 있다.

보장성 강화 명목으로 앞으로 5년간 무려 9조원의 보험재정을 쏟아붓겠다면서 리피오돌의 약가 협상에는 수비적이었다. '내로남불'(내가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이라 했던가. 게르베코리아처럼 정부도 건보재정 사용 순위에서 리피오돌을 후순위에 뒀던 모양이다. 국회의원들의 지적처럼 환자들의 목숨이 달려있는데도 말이다. 

리피오돌의 공급중단 책임에서 복지부와 건보공단이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 이제는 그 책임까지 제약사에 떠넘기려 하고 있다. 리피오돌 사태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며 제약사의 공급의무를 약가협상 부속 합의서에 넣고 "공급의무를 지지 않을 거면 약가협상은 꿈도 꾸지 마라"는 식이다.  

이번 지침개정과 관련해 강청희 건보공단 급여상임이사는 "의약품의 원활한 공급은 제약사의 사회적 의무이자 보험급여 등재의 전제조건인데, 의약품 공급 문제 발생 시 정부나 보험자가 공급을 강제할 수 있는 방안이 없었다"며 "공급 의무 계약 등은 환자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자 보험자의 책무"라고 밝혔다.

강 이사는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존재 이유인 기업에 의약품의 원활한 공급 '책임'도 아닌 '의무'를 부과했다. 건강보험 재정으로 수익을 내고 있으므로 도의적 책임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의무가 돼야 하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자발적으로 약가를 인상하는 방안이 있는데도 "공급 문제 발생 시 건보공단으로서는 공급을 강제할 수 있는 방안이 없다"며 마치 모든 잘못이 제약사에 있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사실 공급 문제 대부분이 기업이 보험약가를 납득하지 못해 발생한다. 건보공단은 협상을 통해 제약사가 수긍할 수 있는 가격을 제시하면 된다. 굳이 제약사를 강제하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건고공단은 제약사 탓만 하고 있다. 

정부는 보험 약가를 깎는 경우는 빈번해도 올려주는 경우는 드물다. 제약사들은 인건비, 원가 등의 상승으로 마진이 계속해서 줄어도 '을'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수익성이 없으면 허가를 취소해 품목을 포기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마저도 쉽지 않게 됐다.

그나마 마진의 문제라면 유통비이나 공정비, 인건비 등을 낮추는 방식으로 조금이라도 이윤을 만들어 낼 틈이 있다. 그러나, 수입 제품인 경우, 해외 제조사가 공급을 중단해버리면 대책이 없어진다.

일부 제약사 관계자들이 이런 상황을 건보공단에 피력했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고 한다. 완충 지대라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건보공단은 그 여지마저 주지 않았다는 것이 제약사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여기에 더해 건보공단은 약가협상 부속 합의서에 '그 밖에 협상 약제에 대한 안정적인 보험급여 및 건강보험 재정관리 등을 위하여 필요한 사항'이라는 항목까지 넣었다. 그 범위를 특정하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셈이다.

이 항목을 적용하면 건보공단은 얼마든지 '합의'라는 명목으로 약가협상 테이블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다.

현재 공급중단으로 논란이 된 제약사는 대부분 해외에 본사를 둔 글로벌 제약사이지만, 이런 상황이 국내 제약사들에도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특히 대체약이 없는 제품을 보유한 국내사들은 수익이 나지 않아도 약을 팔아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커졌다.

안그래도 건보공단이 약가를 빌미로 제약사들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이번 지침 개정은 그 권한을 한 층 더 남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제약업계에서는 "건보공단이 국민들 눈치 봐서 보험료를 크게 올릴 수 있겠느냐. 모자란 건보재정을 확보하는 데 가장 만만한 게 제약사를 쥐어짜는 것"이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약가는 제약사 경영에 직결되는 문제다. 건보공단이 약가를 무기로 제약사들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에 침입해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의미다. 건강보험 제도가 사회주의적 성격이 짙다고 하지만, 선을 넘지는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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