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성과 진지성을 갖춘 새로운 의료사고피해구제법안을 기대한다
현실성과 진지성을 갖춘 새로운 의료사고피해구제법안을 기대한다
  • 홍영균 변호사
  • admin@hkn24.com
  • 승인 2009.06.05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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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이 저물 즈음, 국회에 ‘의료사고 예방 및 피해구제에 관한 법률안’이 의원입법 형식으로 발의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의료소송 전문변호사로서 더구나 환자 또는 피해자측을 더 많이 변론하는 변호사로서 각별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발의된 법안(‘의료사고구제법안’이라 약칭한다)의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첫째, 의료사고로 인한 피해를 생명·신체 및 재산상의 손해가 발생한 경우로 한정한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실무상 가동연한을 넘긴 고령자가 의료사고를 당했을 때 또는 재산상 손해는 없지만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었을 때에는 정신적 피해만 인정되는 경우가 있다. 오히려 이들 경우가 소송상 구제받기가 더 어려운 상황이며 소송상 불이익을 당했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더 많다. 소송실무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조물책임법을 모방한 책상 위의 법안이라는 느낌이 드는 이유이다.

둘째, 배상보험의 가입을 강제하는 것은 의료계 현실과 보험계약의 특수성을 도외시한 규정이다. 작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의사면허 소지자는 88,383명이며 이 가운데 전문의는 73.5%이다. 그리고 전문의 가운데 92.2%는 개원의이며 내과 전문의가 8524명(12.5%)에 이른다. 그런데 의료사고가 발생하는 진료과목은 산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심장내과, 소아과 등이고 내과와 외과는 상대적으로 발생 빈도가 약하거나 손해액이 그다지 높지 않다. 이런 현실에서 배상보험 가입을 강제하면 내과와 외과의들이 이에 순응할까! 장래의 불확실한 위험부담이 전혀 없거나 근소한데 어느 누가 보험을 가입할 것인가! 현실성이 부족한 대목이다.

셋째, 입증책임을 전환시키는 문제는 좀더 논의되어야 한다. 구성요건분류설에 따른 입증책임론을 엄격하게 고집한다면 피해자측이 의료진의 과실과 발생된 손해 그리고 양자간의 인과관계를 모두 입증하야 한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원칙을 사실상 폐기하였다. 다수의 정황증거 내지 간접증거의 제출로도 의료과실을 인정한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주장·입증된 의료과실이 손해와 인과관계가 없다는 사실의 입증책임부담을 의료진에게 부담시킴으로써 피해자의 입증책임을 완화시키고 피해자를 보호한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서 무과실의 입증책임마저도 의료진에게 전가시키는 것이 타당한가? 이를 인정하면 의료진은 의사 면허가 있다는 사정만으로 소송의 공격적 방어자가 되어야 하는 불공평한 결과를 초래한다. 제조물책임은 대량생산·대량판매·대량소비로 인한 대량손해발생의 위험 부담이라는 나름대로의 입법취지가 있다. 하지만 의료소송에는 정보의 편중이라는 문제만 있을 뿐이지 제조물책임과 같은 문제의식이 없다.

그리고 법률가, 공학기술자, 공인회계사와 달리 의료계에만 입증책임을 전가할 합리적인 차별 이유 역시 없다. 이들 직업군의 과실로 인한 소송에도 역시 정보의 편중이라는 문제는 잔존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소송과 달리 의료소송에는 설명의무위반, 입증방해, 입증책임의 완화, 적시제출주의의 예외, 책임제한 등의 독특한 심리 및 판단과정들이 있다.

이들은 민사소송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피해자들을 법적으로 보호해 주기 위한 법관들의 고뇌어린 산물들이다. 법관들이 의사 또는 병원측의 현란한 의학적 견해와 민사소송법상의 변론주의라는 실정법 한계 속에서 찾아낸 진주와도 같은 산물들이며 실질적인 정의와 평등을 구현하기 위한 고민들인 것이다. 그런데 의료사고구제법안은 이러한 노력들을 모두 무장해제시키면서 동시에 의료사고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의료계 여론을 의식한 무마책 제시에 급급하여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입증책임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의료사고피해구제위원회의 역할 설정에도 문제가 있다. 의료분쟁의 조정은 민사절차이다. 형사절차와 달리 민사절차는 당사자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여야 하며 불편부당의 변론주의 원칙이 적용된다. 그런데 위원회는 직권으로 문서·물건 등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으며 자문을 얻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상대방의 방어권이 무시되고 있다. 그리고 조정절차에서의 진술을 민사소송에서 원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삼심제의 헌법 규정에 합치되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행정심판과는 사건의 복잡성에서 차원을 달리함에도 불구하고 90일 이내에 조정결정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스스로 형식적인 조사를 예정하고 있다. 그리고 배상금의 결정 기준을 대통령령으로 정한 것 역시 어색하다. 법원의 결정 기준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간판사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섯째, 형사처벌의 특례를 인정할 필요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배상보험의 가입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도 문제이지만 과연 교통사고처리특례법과 동일한 가치선상에서 형사특례를 인정하는 것이 옳은지 재검토해야 한다. 기소되어도 거의 벌금형이 선고된다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94년의 의료법 개정으로 의사면허와 무관하게 되었다는 점을 반영하지 않은 1988년식 법안의 잔영에 불과하다.

이 글이 자칫 입법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쳐질까봐 두렵다. 의료사고의 피해자는 두텁게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목적이 모든 수단을 합리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무과실의료사고보상과 같은 입법정신은 타당하다. 하지만 다른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전문가와 관심 있는 분들의 진지한 검토와 논의가 더 선행되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의료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의료현실의 구조개선과 공정한 진료기록감정기구의 모색이지 엉성한 입법이 아니다. 섣부른 입법은 의료사고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대못이 될 수 있다. 기대감이 크고 절박하기 때문에. <헬스코리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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